‘위험한 사회’ 대한민국 <상> 보릿고개 → 연탄가스 → 외환위기 … 위험도 진화 [중앙일보]
중소기업인 문형국씨를 통해 본 위험 변천사
90년대 중반까지는 태풍·홍수가 가장 큰 난리
갈수록 경제적 위험이 재해·재난보다 위협적
최근엔 금융위기 날벼락 … “한치 앞도 안 보여”
관련핫이슈
문 사장은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새롭고 강력한 위험과 맞닥뜨려 있다. 요즘 그는 이제껏 겪어온 위험을 되짚어본다. 유년 시절인 1960년대에는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다. “초등학교 시절 한 반 60명 가운데 서너 명은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점심 시간이면 수돗가로 달려가 배를 채웠다”고 말했다. 농사를 짓던 부모님은 비가 많이 와도 걱정, 가뭄이 들어도 걱정이었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중·고교 때는 연탄가스 중독을 걱정하면서도 매일 밤 ‘사신(死神)’과 동거해야만 했다. 대형 병원마다 연탄가스 중독 환자를 위한 치료기를 갖춰 놓았다는 간판을 내걸며 광고하는 시절이었다. 76년 한 해 연탄가스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1013명이었다.
먹고사는 걱정은 80년대 중반 이후 사라졌다. 하지만 94년에 성수대교가, 95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져내렸다. 문 사장은 “누구라도 부실공사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섬뜩하다”고 말했다. 그 몇 년 뒤 외환위기가 닥쳤다. 문 사장은 “당시 근무하던 LG산전의 사업부 하나가 몽땅 없어져 동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그때를 기억했다. 98년 겨울, 그는 10년 넘게 몸담던 직장을 떠나 회사를 차렸다.
사장이 된 뒤에는 작업장 사고가 생기지 않을까 가슴 졸인다. 20대의 절삭 기계에는 ‘안전’을 강조하는 노란색 경고 딱지가 10여 개씩 붙어 있다. 문 사장은 “조금만 방심해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해마다 두 차례씩 안전교육을 실시한다”고 말했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하면서 해킹이 늘어나는 것도 문 사장에게는 걱정거리다. 직원들의 개인정보나 생산 기술 노하우가 순식간에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문 사장은 3년 전 겨울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었다.
문 사장의 貫?굴곡은 우리 사회가 경험한 위험의 축소판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위험’이라고 하면 태풍·홍수 등 자연재해에 교통사고, 대형 건축물 붕괴, 폭발사고 등이 대부분이었다. 구포역 열차 탈선 사건(78명 사망), 아시아나항공 추락사고(66명 사망), 위도 페리 침몰 사건(292명), 성수대교 붕괴(32명), 대구지하철 가스폭발사고(101명), 삼풍백화점 붕괴(502명) 등 대형사고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97년의 외환위기는 위험에 대한 인식을 확 바꿔놓았다. 취업난, 실업에 대한 공포, 빈부격차, 노후 걱정 등 ‘경제적 위험’이 자연재해나 사고보다 앞 순위에 놓이게 됐다.
그렇다고 재래식 위험이 눈에 띄게 준 것도 아니다. 지난해 차량 1만 대당 사망자가 3.1명으로 OECD 평균(1.5명)의 두 배를 넘는다. 화재는 3만6400건이 발생해 최근 10년간의 평균치(3만2800명)를 넘는다. 산업재해도 증가해 지난해 9만 명이 피해를 봤으며 그중 24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다 정보화가 가져온 역기능이 사회불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경찰에 접수된 사이버범죄 신고 건수는 14만3000건으로 2001년(7만6500건)의 두 배 수준이다. 언제 해킹이나 개인정보 침해, 인터넷 사기 등의 피해자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환경안보(Environmental Security)’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전통적 위험이 여전한 가운데 과학기술적 위험, 생태환경과 관련된 위험, 먹거리 위험 등 첨단 위험이 떠오르면서 뒤엉킨 모습이다. 사회가 단순위험 사회에서 ‘복합위험 사회’ ‘이중위험 사회’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전북대 정태석(사회학) 교수는 “ 한국은 경제 발전 과정에서 선 성장, 후 분배 원칙을 내세우면서 제대로 대책이 없었던 것이 그 원인”이라고 말했다.
김상우·이정봉 기자
[‘위험한 사회’ 대한민국] 교통사고에는 둔감, 인간광우병엔 민감 [중앙일보]
한국인, 생소한 위험 더 두려워해
관련핫이슈
2007년 말 현재 영국과 한국에서 발생한 인간광우병의 발생 건수다.
그러나 한국인 중 상당수가 국내에서 발생한 적이 없는 인간광우병을 걱정하고 있었다.
중앙일보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중앙대 차세대에너지안전연구단의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68.8%가 ‘광우병을 걱정한다’고 답했다. 지난해 유럽연합(EU)이 유럽 30개국 국민을 상대로 조사한 ‘유로 바로미터’(2007년) 설문 조사에서 영국인의 응답 비율(40.5%)보다 훨씬 높다. 광우병이라는 동일한 대상에서 느끼는 위험 강도가 이처럼 달랐다.
이런 현상에 대해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폴 슬로빅(미국 오리건대 심리학)은 “사람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더 불안해 한다”고 말했다. 객관적인 위험의 크기와 상관없이 생소한 위험일수록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이재열(사회학) 교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비해 교통사고가 잦은데 사람들은 교통사고에 대한 위험을 덜 느낀다”며 “익숙한 위험에 대해 둔감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자동차 1만 대당 사망자 수가 한국은 3.4명, 프랑스는 1.4명이다. 그런데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은 한국 32.4%, 프랑스 74.8%다.
심리학자 피터 샌드먼(미국 미시간대)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위험의 크기는 위해성에 분노가 합쳐져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정책을 불신하고, 위험을 발생시키는 대상자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을 때 위험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음식물의 비위생적 관리에 대해 79.7%가 ‘우려한다’고 답한 것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만두 소 파동, 기생충 김치같이 먹거리 안전에 대해 국민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위험하다고 느낀다 해서 그에 맞춰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선택할 때 한국인이 고려하는 것은 맛(19.3%)-가격(18.1%)-질(15.5%)-가족의 건강(12.5%) 순이다. 유럽 응답자들은 질-가격-신선도-맛의 순서라고 답했다.
한국인은 59.7%가 원자력을 에너지로 사용하는 것에 찬성했다. 반대한 사람은 12.8%에 머물렀다. 원자력 강국인 프랑스에서의 찬성률은 35%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 방폐장이 건설되는 것에는 경제적 보상이 아무리 충분해도 반대한다는 의견이 53.3%였다.
경희대 황주호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각종 에너지에 대해 막연하면서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고 있어 에너지난을 해결하기 위해 원자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는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봉 기자
‘위험한 사회’ 대한민국 <中> 중산층 "노후 걱정” … 저소득층 "밥벌이가 문제” [중앙일보]
소득 수준에 따라 ‘위험 대처법’ 극과 극
수입 많을수록 복지수준·체면 지키는 데 집중
얇아지는 중간계층 위해 사회안전망 확대해야
관련핫이슈
윤씨 부부는 오래전 정년퇴직의 꿈을 접었다. 그는 “10년 안에 노후 대비를 마쳐야 한다고 생각하면 조급해진다”고 말했다. 윤씨는 지난해 대학원(외국어 전공)에 입학했다. 인생 2모작을 위한 준비다. 질병이나 사고에 대한 걱정이 있기는 하지만 대비책을 세워뒀다. 월 55만원씩 매달 4개 보험을 들고 있어 든든하다.
일용직인 김모(44·서울 구로동)씨에게 닥친 위험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전신에 59%의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갔다. 화상은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병원에서 연결해준 후원금으로 치료를 하고 올해 6월 퇴원했지만 아직 1억여원의 치료비가 밀려 있다. 기초생활수급권자로 매달 100만원의 국가보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에겐 갚을 길이 막막하다. 그는 외환위기로 자신이 경영하던 회사가 부도나 월세 20만원짜리 단칸방으로 옮긴 후에도 재기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아내 이모(37)씨는 “사업에 실패했지만 꿈을 갖고 밝게 살아온 남편”이라며 “화상을 입은 후 이젠 꿈마저 접었다”고 낙담했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위험도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소득에 따라 걱정하는 위험의 종류가 다르다. 같은 위험에 처했을 때 받는 충격도 다르다. 중앙일보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중앙대 차세대에너지안전연구단이 공동으로 실시한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월소득 500만원 이상은 5.5%가 가족의 질병이나 사고로 빚진 경험이 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소득 200만원 미만의 계층에선 8%가 그런 경험을 했다고 답했다. 소득이 높은 계층은 각종 질병이나 사고에 대비, 보험에 많이 가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민간보험 가입률은 고소득층이 69.5%, 중간계층이 58.6%, 저소득층이 40.6%였다.
◆중산층은 노후가 가장 큰 위험=장덕진 서울대(사회학) 교수는 “저소득층일수록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가 잦고, 대비책이 약해 피해가 커진다”고 말했다. 소득이나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한번 위험에 빠지면 위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능력이 떨어져 양극화가 심화된다.
소득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위험을 걱정한다. 건설과 해외인력공급 사업을 하는 최성재(54·서울 방이동)씨의 소득은 월 4500만원 정도다. 그는 최근 국세청이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은 사람의 골프장 회원권을 압류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최씨는 종부세·자동차세 등 모든 세금내역을 다시 들여다봤다고 한다. 교통법규 위반 과태료까지 챙겼다. 그는 “그런 일을 당해 사교모임에 알려지거나 해외 출장·여행을 가려다 공항에서 뒤돌아서는 일이 생기면 얼굴을 들 수 없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사회적 인식이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을 위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최씨 역시 다른 응답자들과 마찬가지로 노후를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로 생각한다. 최씨에게 노후 대책은 현재 누리는 사회적 평판도를 유지하는 것이 초점이다. 그는 최근 지방에 1000여 평의 땅을 구입하고, 해외 골프장 회원권을 샀다. 최씨는 몸이 조금만 이상해도 병원으로 달려가기 때문에 건강에 별 문제가 없다고 자신한다. 월 250만원 정도 내는 민간 보험이 뒤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중산층이나 저소득층을 막론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일할 수 있는 실버잡 창출정책이 절실하다”며 “이렇게 되면 노후에 소득계층 간 격차가 좁아지고 내수 진작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소득층 위험 관리 정부 몫”=이번 조사에서는 또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노후, 전염병, 화재, 교통사고 등 각종 위험에 더 불안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화재에 대해 중졸 이하 학력자의 45.8%가 갈수록 위험하다고 응답한 반면 대학 중퇴 이상자는 25.6%만 위험 요소로 봤다. 중졸 이하의 사람은 52.3%가 운없는 사람이 사고를 당한다고 했지만 대학 중퇴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은 36.7%가 위험을 운으로 돌렸다. 교육수준이 낮을수록 위험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한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국민들이 처할 수 있는 위험 가운데 많은 부분을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보건사회연구원 윤석명 박사는 “경제 위기상황이 닥치면 외환위기 이후 얇아진 중산층이 더 얇아지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며 “중산층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가장 미흡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확대하고 근로자뿐 아니라 영세 자영업자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긴급구호제 등을 도입, 중산층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기찬 기자
'Social Polic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전환의 시대 (0) | 2009.05.18 |
---|---|
위험한 사회 3 (0) | 2008.11.30 |
위험한 사회 1 (0) | 2008.11.30 |
아직도 탄광에 조선인들이 갇혀 있다 (0) | 2008.08.23 |
Bad Cow Disease (0) | 2008.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