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w Birth

애 안 낳는 사회 5<믿고 맡길 곳이 없다>

changebuilder 2005. 10. 18. 22:45
[애 안 낳는 사회] 5. 믿고 맡길 곳이 없다

"직장 다니며 둘째는 꿈도 못 꿔"

보육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정윤재씨. 정씨는 "현재와 같은 질 낮은 보육 서비스가 제공되면 취업 여성은 퇴직을 하거나 아이를 안 낳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정보기술(IT) 업체에 다니는 정민숙(가명.31)씨는 최근 둘째아이 낳을 꿈을 접었다. 정씨는 첫째가 세 살이 된 올 봄 고민 끝에 둘째를 임신했었다. 그러나 석 달 전 유산됐다. 첫째 아이를 키우는 데 따른 과로와 직장 스트레스가 겹쳐 유산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하루 일과가 '조바심과 눈치보기'의 연속이었다는 호소다. 아침엔 첫째아이를 놀이방에 데려다 주느라 지각하기 일쑤였고, 저녁엔 아이를 데리고 오기 위해 '칼퇴근'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난 3년간 그의 회사 고과 점수는 내리 최악이었다. 아이를 재운 뒤 컴퓨터로 밀린 회사일을 짬짬이 하느라 항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기도 했다.

정씨는 "둘째를 임신했다고 말하자 직장 동료들까지 애 키울 대책도 없이 일을 저지르느냐는 눈치를 줬다"며 "무리를 해서라도 애를 더 낳으려 했으나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서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증권회사에 다니는 하모(31)씨의 호소도 비슷하다. "지난 3월 출산을 한 뒤 한동안 '육아 우울증'에 걸렸어요. 집 근처의 보육시설이 맘에 들지 않아 파출부 아줌마를 썼는데 그도 미덥지 않아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아이를 키울수록 둘째를 낳을 생각이 사라져요."

영유아를 잘 키워줄 육아시설 부족이 저출산의 한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취업 여성들은 집 가까운 곳에 믿고 맡길 만한 좋은 보육시설이 없는 한 애를 낳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본지가 지난달 말 전국의 기혼남녀 679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를 보면 출산 및 육아지원 정책에서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육시설 확충 및 수준 향상'이 전체의 42.7%나 됐다. 보육서비스가 개선되지 않으면 여성들의 '출산 파업'은 멈추기 어렵다는 얘기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서문희 부연구위원은 "자녀 양육을 여성에게만 떠넘긴 채 나 몰라라 하는 우리의 사회구조가 걸림돌"이라며 "남자들의 적극적인 양육 참여 유도와 함께 보육의 인프라를 갖추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 "보육은 육복(六福) 중의 하나"= 보육시설 및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이다. 국무조정실이 지난 4월 일반 국민 700명과 전문가 30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일반 국민의 88%와 전문가 91.4%가 각각 주변에서 만족스러운 보육시설을 찾을 수 없다고 응답했다.

회사원 박모(32.서울 강남구)씨는 "여자한테는 오복에다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보육의 복(福)'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며 "출산 하자마자 좋다고 소문난 S어린이집에 신청을 했지만 1년이 지난 최근까지 대기 중"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손꼽히는 몇몇 어린이집은 신청한 뒤 최소한 1~2년은 기다려야 한다.

현재 전국의 보육시설은 국공립과 민간시설을 합쳐 총 2만3424개. 1991년의 3690개소에 비해 양적으로 크게 증가한 수치다. 하지만 전국의 면 단위 지역 중 보육시설이 없는 곳은 516개나 된다. 특히 야간 또는 24시간 보육시설 등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특수보육 시설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 시설 많아도 믿고 맡길 곳 적어=다섯살 된 큰아이를 집 근처 놀이방에 맡겼던 정윤재(34.경기도 용인시)씨는 최근 다니던 외국계 은행을 그만뒀다.

"아이가 놀이방을 가면서 감기를 달고 살았고, 수족구병 등 유행병은 다 걸려왔죠. 퇴근 시간이 불규칙해 교사에게서 눈총을 받고, 시설이 맘에 안 들어도 참고 견뎠어요. 하지만 둘째애를 출산한 뒤에는 힘들어서 더 이상 다닐 수 없었어요." 정씨는 "이런 유의 놀이방은 엄마가 직장 생활을 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중고를 주어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했다"고 목청을 높였다.

아이의 목숨까지 뺏어가는 안전사고는 자녀를 보육시설에 맡긴 부모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어린이집에서 키우던 개에 물려 죽기도 하고(울산시 S어린이집), 천장이 무너져 죽거나 다치는 사고(대전시 S유치원)도 발생했다.

회사원 김모(32.경기도 성남시)씨는 "이 같은 얘기를 들으면 둘째아이를 낳을 생각은커녕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는 첫째아이도 내가 키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심란하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전체 보육시설의 정원 중 15.4%가 비어 있다. 숫자로 보면 15만명의 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보육 소비자가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청주대 표갑수 교수(한국영유아보육학 회장)는 "이제는 보육시설의 양적 확대보다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최근 들어 보육시설의 안전성, 교사의 수준 등 서비스의 질적 수준을 높여 달라는 부모들의 목소리가 부쩍 많아졌다는 설명이다.

서울신학대 백선희(사회복지학과)교수는 "아이 키우는 문제를 각 가정에 맡겨 둘 게 아니라 지역사회와 국가가 함께 나서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아이를 믿고 맡길 곳이 없어 출산하지 못하는 여성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특별취재팀

김시래 팀장,신창운 여론조사전문위원,문경란 여성전문기자,신성식.신예리.박혜민.김영훈.김정하.하현옥 기자<srkim@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2004.09.19 18:42 입력 / 2004.09.20 07:37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