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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지난해 1월 행정기관 중 최초로 ‘리스크 관리 평가팀’을 만들었다. 이 팀은 시민과의 갈등, 다른 지자체나 정부 부처와의 대립 등 예상되는 위험을 관리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대표 사업인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어떤 갈등이 있었고, 어떻게 해결했는지 등을 정리한다. 오희선 서울시 리스크 관리 평가팀장은 “불필요한 충돌을 막고 사업 차질을 피해 세금과 행정력 낭비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위험 관리’가 개인과 기업, 국가의 핵심 능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위험 관리는 현재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미래의 손실을 예방하는 전략이다. 위험을 완전히 피할 순 없는 것이고, 이를 최소한으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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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관리가 조직 생사 가른다”=위험 관리 능력은 기업의 생사까지 좌우한다. 2000년 3월 미국 엘버커키에 있는 필립스 반도체 공장의 화재는 위험 관리의 중요성을 잘 보여 준다. 당시 이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생산라인 중 절반이 멈췄고 정상화되는 데 반년 이상 시간이 필요했다. 필립스의 부품을 사용하는 노키아는 비상 사태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세계 각지의 생산라인을 가동했다. 반면 비상 계획이 없던 에릭손은 3개월 만에 4억 달러의 손해를 보고 다음해 일본의 소니와 합병됐다.
위험 관리를 제일 먼저 도입한 곳은 금융권이다. 금융회사들은 10여 년 전 최고위기관리책임자(CRO:Chief Risk Officer) 제도를 도입하고 위험 상황을 관리해 왔다. 그러나 신종 위험에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NH투자증권의 김중구 전무는 “금융권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위험 관리를 도입했지만 이번처럼 새로운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다”며 “규제 완화와 위험 관리 사이의 균형을 찾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인 보호에 취약한 한국”=개인을 위험에서 보호하는 데 정부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한국인은 사회적 안전망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본지와 서울대사회발전연구소, 중앙대 차세대에너지안전연구단의 조사 결과 ‘갑자기 돈이 필요할 경우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이 18.4%였다. 영국(9.4%)·프랑스(7.1%)·이탈리아(5.8%)에 비해 높은 수치다. ‘우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다’고 답한 사람도 8.3%로 이탈리아(5.5%)·프랑스(4.8%)·체코(3.6%)·영국(3.1%)보다 높다. 정부가 위험 방지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결과다. 실제로 노령·질병·실업·재해에 직면한 개인을 돕는 정부의 지출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1%(2005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다.
보건사회연구원의 윤석명 박사는 “경제위기 등 위험 상황에서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되면 국가의 위기”라며 “정부가 갑작스러운 위험에 빠진 개인을 위한 긴급구호제 등을 만들고 중산층을 위한 주택정책 도입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정부는 올 2월 국무총리실에 ‘사회 위험·갈등 관리실’을 만들어 위험 관리에 나섰지만 걸음마 단계다. 총리실 산하의 ‘먹거리 안전 확보 TF’는 올 9월 중국발 멜라민 사태가 터졌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김은하·이정봉 기자
[‘위험한 사회’ 대한민국] 황사·사료값 급등·AI 국경 넘어 무차별 피해 [중앙일보]
세계화 하는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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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가 넘어야 하는 위험은 이뿐만 아니다. 겨울이면 해외에서 날아드는 철새가 옮기는 조류 인플루엔자(AI) 때문에 비상이 걸린다. 그는 2003년 12월 정읍시에서 발생한 AI의 직접적 피해자는 아니다. 농장이 AI 발생지에서 반경 3㎞ 이내에 들지 않아 간신히 살처분을 피했다. 그러나 그 여파는 심각했다. 닭이 팔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듬해 봄 석 달 동안 1억원을 벌었으나 사료값 등 관리비로 3억원이 나갔다. 올해 4월에도 AI 때문에 4개월을 공쳤다. 그는 “살처분 대상 농가는 생활안정자금이 최고 1400만원까지 나오는데 다른 농가는 사료값은 사료값대로 들고 닭은 안 팔려 죽을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봄철 중국·몽골 등에서 황사가 날아들면 강씨는 계사를 커튼으로 막고 환풍기를 돌린다. 강씨는 “봄에는 건조하고 꽃가루도 날려 닭들이 기관지염에 많이 걸리는데 황사까지 겹치면 다 죽어나간다”고 호소했다
◆한 나라에만 머물지 않는 위험=환율·유가·AI·황사…. 모두 해외에서 ‘수입’되는 위험 요소다.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고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정보가 유통되는 세상에 위험은 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국경을 수시로 넘나든다.
올 9월 멜라민 식품 파동도 한 예다. 9월 12일 분유에서 멜라민이 검출됐다고 중국 당국이 발표한 지 일주일 만에 한국에서 멜라민이 든 식품이 발견됐다. 일본·뉴질랜드·키르기스스탄에서도 줄줄이 중국산 멜라민 식품이 나타났다. 좁아진 지구촌에선 전염병이 확산되는 주기도 짧아진다. 1347년 이탈리아에 나타난 흑사병은 유럽에 퍼지는 데 4년이 걸렸다. 2003년의 중증 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은 전 세계로 번지는 데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국경을 넘나드는 위험은 발생 지역과 피해 지역이 다른 경우가 많다.
영국·독일의 공장에서 뿜어낸 오염 물질이 1000㎞ 떨어진 스웨덴·노르웨이의 호수를 망친다. 중국·몽골의 산업화와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 때문에 넓어진 타클라마칸·고비 사막에서 황사가 서해를 넘어 불어든다. 삼성지구환경연구소 정예모 박사는 “환경문제는 한 국가가 조절할 수 없고, 피해 범위가 넓다는 특징이 있다”며 “여러 국가 간의 정보 공유와 공조가 필수적이고, 나라 안에서도 위기 대응 시나리오를 미리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각국은 국경을 넘어오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협상테이블에 앉는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 강홍렬 박사는 “환경이나 금융 네트워크 등 온 국가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인프라’에 위험이 감지되더라도 손해를 무릅쓰고 고쳐보겠다고 나서는 국가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정봉 기자
[‘위험한 사회’ 대한민국] 미국 의회에 설치된 특별위원회 도입을 [중앙일보]
전문가 의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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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사고가 발생하면 기술적인 문제점 외에 안전 규제 체제나 제도에 허점이 있었는지를 조사한다. 의회에 이와 관련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이 위원회는 제도를 바꿀 필요성이 있는지, 제도 운영을 담당하는 국가 기관의 적정성에 문제가 없는지까지 검토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기관이 없다. 위험은 위험을 만들어내는 쪽과 피해자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전망 구축이 공공재의 성격을 갖고 있어 민간이 적극적으로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인이나 기업에만 위험관리를 맡겨 놓아서는 안 된다. 기업에 맡기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고가 나면 사회 전체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 사고 위험을 관리하고 투자해야 한다.
윤기봉(중앙대 교수·차세대에너지안전연구단장)
2007년 말 현재 영국과 한국에서 발생한 인간광우병의 발생 건수다.
그러나 한국인 중 상당수가 국내에서 발생한 적이 없는 인간광우병을 걱정하고 있었다.
중앙일보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중앙대 차세대에너지안전연구단의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응답자의 68.8%가 ‘광우병을 걱정한다’고 답했다. 지난해 유럽연합(EU)이 유럽 30개국 국민을 상대로 조사한 ‘유로 바로미터’(2007년) 설문 조사에서 영국인의 응답 비율(40.5%)보다 훨씬 높다. 광우병이라는 동일한 대상에서 느끼는 위험 강도가 이처럼 달랐다.
이런 현상에 대해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폴 슬로빅(미국 오리건대 심리학)은 “사람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더 불안해 한다”고 말했다. 객관적인 위험의 크기와 상관없이 생소한 위험일수록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이재열(사회학) 교수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비해 교통사고가 잦은데 사람들은 교통사고에 대한 위험을 덜 느낀다”며 “익숙한 위험에 대해 둔감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자동차 1만 대당 사망자 수가 한국은 3.4명, 프랑스는 1.4명이다. 그런데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은 한국 32.4%, 프랑스 74.8%다.
심리학자 피터 샌드먼(미국 미시간대)은 “사람들이 인식하는 위험의 크기는 위해성에 분노가 합쳐져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정책을 불신하고, 위험을 발생시키는 대상자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을 때 위험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음식물의 비위생적 관리에 대해 79.7%가 ‘우려한다’고 답한 것도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만두 소 파동, 기생충 김치같이 먹거리 안전에 대해 국민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다.
위험하다고 느낀다 해서 그에 맞춰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선택할 때 한국인이 고려하는 것은 맛(19.3%)-가격(18.1%)-질(15.5%)-가족의 건강(12.5%) 순이다. 유럽 응답자들은 질-가격-신선도-맛의 순서라고 답했다.
한국인은 59.7%가 원자력을 에너지로 사용하는 것에 찬성했다. 반대한 사람은 12.8%에 머물렀다. 원자력 강국인 프랑스에서의 찬성률은 35%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자신이 사는 지역에 방폐장이 건설되는 것에는 경제적 보상이 아무리 충분해도 반대한다는 의견이 53.3%였다.
경희대 황주호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각종 에너지에 대해 막연하면서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 알고 있어 에너지난을 해결하기 위해 원자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는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봉 기자
열광적인 개종자라도 되는 듯 설쳐대는 은행가들은 정작 이윤은 자기네들이 챙기면서 손실은 ‘국유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때론 조롱거리로, 때론 악마 취급을 당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중국식 국가계획경제가, 이제 자유방임을 외쳐대던 앵글로색슨 사회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일까?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고 온 세계정치의 대변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상 상황이 닥칠 것이란 ‘기대’는 전세계의 국경 없는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비상 상황은 더 이상 일국 단위가 아닌 범지구적인 사건이다. 세계 경제위기, 기후 변화, 테러리즘 등 ‘세계적 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적, 공간적, 시간적인 의미에서 비상상황의 ‘탈국경화’ 가 진행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세계정치 무대에서 새로운 금융정책의 장이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 상황은 ‘사회적’으로 탈국경화되고 있다. 이는 가장 좋은 구제방안을 둘러싼 각국 정부의 경쟁에서 잘 드러나는데,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처럼 경쟁의 승자에게는 국내외적으로 불사조처럼 정치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간의 완고한 국제정치 룰을 변화시키려는 권력 게임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에서, 또 글로벌 경제와 정치, 초국가적 기구들 사이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게임에서는 누구도 혼자서만 승리를 챙길 수는 없다. 마치 한 나라의 정부가 글로벌한 테러리즘과 맞서 싸울 수 없듯이, 한 나라 정부가 혼자 힘으로 기후변화와 맞서 싸울 수 없고, 한 나라 정부 혼자서 금융시장의 대파국에 대처할 수 없다.
비상 상황은 ‘공간적’으로도 기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극도로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금융 리스크란 계산될 수도, 만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가 중심이 된 ‘첫번째 근대’의 공간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 대규모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적어도 만회할 수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각국은 그 피해를 (예를 들어 금전적인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 되돌려왔다. 그러나 만일 세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된다면, 지구상의 기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화한다면, 테러조직이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면, 때는 이미 늦다. 이처럼 인류가 맞닥뜨린 질적으로 새로운 위협 앞에서 더 이상 ‘만회’의 논리는 설 자리가 잃게 되고, 대신 ‘예방’의 원리가 그 자리를 꿰찬다.
마지막으로 비상 상황의 ‘시간적’ 탈국경화는 앞서 말한 위험의 계산 불가능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든 이들은 바로 눈앞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며 으레 파국의 악숙환이 이제는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더 나쁜 상황이 비로소 자신들 눈앞에 닥쳐 그 희망이 산산조각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악성’ 신용이란, 마치 끝없는 폭설 속에서 일어나는 눈사태와 비슷하다. 즉 사람들은 리스크의 존재는 알지만, 언제 어디서 눈덩이가 무너져내릴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나락으로 몰고가려 위협하는 각종 위험에 대한 인식은 그 위험에 맞선 대항 행동을 촉발시키는 동력이 된다. 일국 차원의 정치공간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 세계정치 차원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글로벌한 위험에 대한 인식은 만만찮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보통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그 인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위험의 ‘지각’(수용)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다보니, 세계무대 차원에서 글로벌 위험에 맞서려는 시도의 유효기간도 미디어의 관심에만 크게 휘둘려왔다.
오늘날 동시대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물질적 상호의존성의 망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그래서 세계 위험사회의 민감한 작동기제가 아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베버와 푸코 같은 이들에게는 공포의 시나리오였던 ‘다스려지는 세계’, 곧 통제 합리성이 지금 이 순간 금융위기의 잠재적 희생자들에게 하나의 동아줄이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에서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은 어찌됐든 국민국가의 이기주의가 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범세계주의자(코스모폴리탄)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점일 게다. 물론, 이는 파국에 대한 ‘기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란 이런 움직임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일테고.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사회학)
<위험사회> 저자인 세계적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한겨레>에 세계 금융위기에 대한 특별기고를 보내 왔다.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붕괴로 일어난 탈국가적 위기에 맞선 ‘국경없는 대응’을 강조했다.
[특별기고] 세계 위기 ‘국경없는 대응’ 필요/ 울리히 벡
사회·공간·시간적으로
경계선은 이미 무너져
국경없는 대응 필요한 때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중국식 체제와도 거리를 두어온 서구의 복음 원리, 즉 자유시장 경제가 하룻밤 사이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