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1980년대 중반 제시한 개념이다. 그는 산업화와 근대화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와 현대인들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새로운 위험을 동시에 몰고 왔다고 지적했다.
과거 우리가 경험하고 익숙했던 위험은 태풍·홍수 같은 자연재난이나 건물의 붕괴 같은 인위적 재난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만든 문명의 이기가 또 다른 위험의 원천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총아는 네트워킹 기술이다. 웬만한 사람이면 지구 어디서나 휴대전화나 노트북을 통해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뿐 아니라 지구를 뒤덮은 항공망, 그물처럼 얽힌 해상 원유 수송로, 그리고 원자력발전소에서 각 가정과 거리의 가로등을 이어주는 송전로, 지하를 채우고 있는 가스관과 하수도관처럼 우리 생활을 가능케 하는 핵심적인 기반시설들의 공통점은 모두 네트워크라는 점이다. 네트워크는 연결을 상징한다. 떨어져 있는 시골의 할머니와 도시의 손자녀를 연결시켜 주는 부호분할다중접속(CDMA)망은 고맙기 그지없는 존재다.
그러나 네트워크는 예전에는 없던 새로운 위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어느 한쪽에서 발생한 위험이 엄청난 피해를 낳기도 한다. ‘네트워크 도미노’라는 재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2003년 나이애가라 폭포에 떨어진 벼락은 북미 동부지역의 전력망을 일거에 마비시켜 수천만 명을 전기 없는 문명 이전의 시기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 생활 깊숙이 침투한 정보기술은 유비쿼터스 사회의 장밋빛 미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어느 날 나의 ▶의료기록 ▶신용정보 ▶교통카드 승하차기록 ▶휴대전화 통화내역 ▶신용카드 구매사항들이 주민등록번호 하나로 단숨에 꿰어진다고 가정해보자. 자연 분해되지 않고 펄펄 살아서 돌아다니던 디지털 정보 쓰레기들이 어느 날 한 데이터마이닝(자료발굴)의 천재에 의해 순식간에 연결되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하다.
글로벌하게 연결된 파생상품의 연쇄고리가 한꺼번에 연쇄부도를 가져온 자본주의 심장부의 혼란이나, 철새를 따라 움직이는 조류 인플루엔자(AI)의 놀라운 이동성, 억척스럽지만 사랑받던 한 연예인을 자살로 몰아간 인터넷의 주홍글씨…. 이런 사례는 네트워크가 편리함과 효용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돌발적 위험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피할 수 없는 위험이라면 이를 막을 수 있는 안전기술을 확보하고 사회 규범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네트워크의 위험 관리는 창의성이 꽃필 수 있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대비해야 하는 최우선 과제다.
이재열 서울대 교수·사회학
자기계발·건강 아직은 ‘작은 위험’… 대비 안 하면 큰 위험 된다 [중앙일보]
[‘위험한 사회’ 대한민국] 건보공단 이근하 대리 살펴보니
위험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불안하다.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일수록 더 그렇다. 현재 안전하다고 해서 미래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위험관리전문가인 서울디지털대학 김중구 교수(NH투자증권 전무)가 회사원 이근하(37)씨가 안고 있는 위험과 취약점을 분석해 봤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대리인 이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12년 전 현재 직장에 입사했다. 회사원인 부인 심미희(34)씨와 초등학생인 딸(10)·아들(7)과 수원에서 살고 있다. 1억7000만원의 23평형 아파트를 갖고 있으며 부부의 연봉을 합친 수입은 7000만원 정도다. 지하철을 이용해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직장까지 출퇴근한다. 평일에는 오후 9~10시나 돼야 집에 들어간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전문가 분석
안정된 직장에 저축 꾸준히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엔 위험 관리 ‘취약’이근하씨는 금융위기에 이은 경기 침체를 걱정한다. 하지만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해두었다고 자신한다. 이씨는 “평소 꾸준히 저축을 하고, 노후에 대한 계획도 세워 놓았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이씨 부부는 수원에 집을 소유하고 있고, 연 7000만원의 수입 중 1200만원을 안전성이 높은 적금이나 개인연금에 넣고 있다. 그의 직장은 공공기관으로 정년이 60세다. 조기 퇴직이나 실직의 위험이 다른 사람에 비해 적다. 퇴직 후에는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충남 보령)에 내려가 농사를 지을 계획이다. 전문가의 진단은 이씨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김중구 교수는 “이씨의 현재 생활은 안정적이지만 미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대비는 충분하지 않다”고 분석했다.

평가 결과 이씨의 위험관리 성적은 1(아주 낮음)~5(높음) 중 2.4인 ‘보통 상태’였다. 문제가 생기면 ‘취약상태(3.0)’로 넘어갈 수 있는 경계선에 있다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위험평가는 금융권에서 사용하는 위기관리 모형을 이씨 개인의 재무 위험과 비재무 위험(가족·건강·전문성·노후준비 등)에 적용했다. 점수는 이씨가 실제 가지고 있는 위험의 ‘규모’와 ‘관리 수준’을 합쳐서 산출했다. 즉 미래에 어떤 큰 위험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더라도 관리나 대비가 잘돼 있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은 위험’이라도 전혀 대비가 없다면 ‘큰 위험’으로 본다. 이씨가 가진 위험의 규모 점수는 2.4였으며 관리수준은 2.45였다.

김 교수는 "현재 이상이 없더라도 가족관계나 중년 위기에 대한 대비는 필수적”이라며 “10년 뒤의 자산과 비용을 감안해 미래를 계획하고 건강 이상, 전문성 부족 등 잠재적인 위험을 무리 없이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은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