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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진보의 길

changebuilder 2008. 4. 17. 21:01

[새로운진보의길] “진보, 그 정신만 남겨두고 다 바꾸자” [중앙일보]

③·끝 진보의 진보를 위하여
좌·우 사이서 정체성 고민 ‘진보의 딜레마’
‘민주화 담론’ 넘어설 새로운 보수 대항마 필요

‘한국 진보의 대전환:구진보에서 신진보로’를 주제로 3월 28일 열린 좋은정책포럼 창립 2주년 기념 심포지엄. 진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진보의 낡은 패러다임과 과감히 단절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오른쪽부터 임혁백(고려대 교수·정치학), 김형기(경북대 교수·경제학) 두 공동대표, 박태주 한국노동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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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등장은 ‘87년 체제’의 종언을 의미했다. 18대 총선은 그 사실을 재확인시켰다. 정치권에 진출한 민주화 운동 세대의 한계가 뚜렷해졌다. 이명박 정부가 인수위원회 활동, 장·차관 임명, 총선 공천 과정에서 노출시켰던 혼선과 잡음을 줄였더라면 진보의 붕괴가 더 심각했을 것이라는 분석마저 있다.

‘보수 압승, 진보 몰락’은 2006년 5·31 지방선거 이후 각종 선거에서 되풀이됐다. 진보의 위기는 구조적 위기라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일시적·상황적인 위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진보하지 않는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진보 진영에서조차 현 상태를 고수하는 한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진보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유권자의 의식을 탓하기 전에 진보 스스로 먼저 반성하고, 또 혁명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핵심은 물론 어떻게 변화하느냐다.

◇진보의 딜레마, 국민의 딜레마=변화의 방향은 종래 잣대로 보면 우향우, 좌향좌 둘 중 하나다. 하지만 그 같은 좌우 이분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시대가 달라졌고, 국민의식도 성숙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련·동유럽 사회주의 붕괴와 북한 체제의 퇴행은 좌향좌 노선이 설 자리를 좁혀 놓았다. 왼쪽으로 가자니 시대의 흐름과 역행하고, 오른쪽으로 가자니 정체성을 의심받는 상황, 진보의 딜레마다. 진보의 고민이 깊어만 가는 이유다.

진보의 딜레마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딜레마도 있다. 건강한 진보가 제 역할을 함으로써 성장 일변도의 부작용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는 국민에게 현재 한국의 진보는 미더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마땅히 선택하고 싶은 진보를 못 찾은 유권자들의 혼란은 이번 총선에서 낮은 투표율과 무소속의 약진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진보의 위상이 축소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평등이란 전통 가치 외에 환경·생태·인권·여성·소수자 문제 등으로 영역을 넓혀나가야 한다. 정치적 진보를 넘어 일상의 진보를 담보해야 할 시기다.

◇새로운 진보의 불씨=총선 직전인 지난달 28일 고려대 인촌기념관. ‘한국 진보의 대전환:구 진보에서 신 진보로’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진보 성향 지식인 모임인 ‘좋은정책포럼’(공동대표 임혁백·김형기)의 2주년 기념 행사였다. 좋은정책포럼이 2006년 1월 출범할 때 당시 언론에선 ‘뉴레프트(신 진보 혹은 신 좌파)’라는 별명을 붙였다. ‘레프트’라는 용어가 우리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부정적 느낌 때문에 그 용어에 거부감을 표하는 인사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좋은정책포럼이 표방한 새로운 이념은 레프트의 부정적 뉘앙스를 훌쩍 뛰어넘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것이었다.

2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선 ‘세계화 vs 반세계화’ ‘친북 vs 반북’ 등의 이념 분쟁이 날카롭게 대립했다. 좋은정책포럼은 그 같은 이분법의 소모전을 진보적 입장에서 뛰어넘자고 제안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새로운 진보의 불씨가 되기에 충분했다.

세계화를 거부할 수 없는 대세로 인정하면서 ‘낙오자 없는 세계화’를 구현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자고 했고, 대북 포용정책을 유지하되 북한의 인권문제 등에 대해 할 얘기는 하자는 자세를 취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고 북한 인권문제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당시 진보 진영의 분위기에서 ‘왕따’가 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2년 전 진보 진영이 이들의 문제 제기를 심각히 수용하고 토론하며 변화를 모색했다면 현재 모습은 무척 달라졌을 수도 있다.

좋은정책포럼은 2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갔다. “한국에서 진보의 위기는 곧 신뢰의 위기이며 정당성의 위기다. 구 진보의 오류를 시정하고 편향을 극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존 사회주의의 붕괴를 통해 이미 실패한 것으로 검증된 구 진보의 낡은 패러다임과 과감히 단절해야 한다. 기존의 진보적 사상과 이론을 제로 베이스에서 재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김형기 경북대 교수의 기조 발제)

진보 하면 평등이란 말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데 그 평등 개념도 새롭게 정의하자는 주장도 제기됐다. 한마디로 진보의 정신만 남기고 모두 바꿀 수 있다는 자세였다. 진보의 핵심 가치는 사회적 형평 구현과 약자 보호다. 그 기본 정체성은 분명히 하되, 그 정체성을 실현시킬 방법은 근원적으로 재정의하자는 제안이었다.

김 교수의 주장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고도 무슨 진보라는 수식어를 붙이냐는 반론이 바로 제기됐다. 진보의 동력을 어디서 찾을 거냐는 질문도 나왔다. 변화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공감한 이들이 주로 모인 자리였고, 당장 정답을 내놓으려는 자리도 아니었지만 토론장의 분위기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김형기 교수는 “기존의 노동자 중심주의,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수평적 평등주의, 분배 편향성 등이 진보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으로 본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리고 “새로운 진보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면서도 그들만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국민의 신뢰를 획득하기 위해 보수와 경쟁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형 제3의 길=보수의 압승은 절로 찾아온 게 아니다. 새로운 보수, 개혁적 보수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보수 진영에서도 약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통합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런 보수의 변신, 보수의 반성이 국민의 지지를 끌어냈다. 새로운 진보가 벤치마킹해야 할 대목이다. 보수의 ‘신무기’ 앞에서 진보는 속수무책이었다. 신무기란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이 신무기의 개발은 곧 보수의 변화를 의미했다. 두 번의 대선과 총선에서 연패한 이후 거의 바닥에 이르렀을 무렵 새로운 보수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보수 세력은 산업화의 주역이란 자부심이 과도했었음을 반성했다. 민주화의 가치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신 보수의 등장이다. 합리적 좌파와는 국익을 위해 대화할 수 있다는 전향적 자세를 취했다.

반면 진보는 여전히 ‘옛 무기’를 휘둘렀다. 민주화 담론을 넘어설 신무기를 개발해 내놓지 못했다.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대의명분만 내세우면 될 줄 알았다. 그 과정에서 진보라는 용어엔 무능과 독선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새로운 진보의 방향에 대한 공감대는 아직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교조적 사회주의의 실패와 북한 체제의 파국적 퇴행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점에 이의를 다는 이는 많지 않다.

새로운 진보에 대한 기대는 ‘진보적 실용주의’ ‘한국형 제3의 길’로 구체화할 전망이다. 각종 편향과 근본주의를 배격하고 실현 가능한 진보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신 보수가 내세우는 선진화(先進化·앞서 나아감)에 맞서 또 다른 선진화(善進化·잘 나아감)의 철학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상당 부분 겹쳐질 것으로 보인다.

배영대·이에스더 기자

※도움말=김태일(영남대 정치외교학)·김형기(경북대 경제학)·김호기(연세대 사회학)·박명림(연세대 정치학)·박태주(한국노동교육원 경제학)·윤진호(인하대 경제학)·이병천(강원대 경제학)·임혁백(고려대 정치외교학)·장상환(경상대 경제학) 교수(이상 가나다순),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